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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전적으로 좀 낯설어보일 이야기”: 생리컵 판매하기

보리초코보 2020. 9. 29.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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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hole idea might seem a little strange to you”: Selling the Menstrual Cup – Technology's Stories

December 4th, 2017 by: Kelly O'Donnell “The whole idea might seem a little strange to you”: Selling the Menstrual Cup Technology’s Stories vol. 5, no. 4 – DOI: 10.15763/jou.ts.2017.12.04.02 PDF: O’Donnell_Whole Idea May Seem Strange In 1971, Ca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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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ety for the History of Technology에서 운영하고 있는 대중 대상의 웹진(블로그?) Technology’s Stories에 게재된 글. 제 연구 주제와 매우 관련이 많아서 번역. [ ]안은 옮긴이 주이고 지금(2021.7) 보니 어색한 부분이 많아서 좀 다듬었다.) 

 

 

1971년, 로스엔젤레스의 페미니스트 여성 건강 센터(Feminist Women’s Health Center). 캐롤 다우너(Carol Downer)와 로레인 로스먼(Lorrain Rothman)은 자궁 자가 진단을 위한 플라스틱 검경(檢鏡 specula)을 나눠주면서, 그들의 생리 추출 도구인 Del-Em를 매우 획기적인 월경 대안으로 선전하고 있었다. 역사가들은 이들의 이야기를 여성들이 새로운 기술적 접근을 사용하는 예시로서, 또 여성의 몸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대한 1970년대의 예시로서 자주 인용해왔다. 같은 시간, 베벌리힐스에서 기업 이사진들이 자기네 회사의 새로운 일회용 생리컵인 태서웨이(Tassayway)를 두고 한 회의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들은 캘리포니아에서의 시범 마케팅 결과와 전국판매를 두고 숙고 중이었다. 소규모 여성해방 운동가들이 [여성의 몸에 대한] 인식을 증진시키면서, 일부 여성의 월경혈은 제거되었으며, 그들의 자궁 경부는 페미니스트 건강 워크숍의 작은 방 안에서 거울을 통해 그들에게[만] 보여졌다. 한편에서는 전국 수만 명의 여성이 생리혈을 모으기 위해 각자의 욕실에서 질에 작은 플라스틱 컵을 집어넣고 있었다.  

 

생리컵은 여타 [월경 관련] 상품과는 놀랍도록 다른 곳에서 출발했다. 생리컵은 피를 흡수하는 대신에 모았다. 그러나 더 낯선 부분은 이 컵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질 안쪽에서 손수 조작해야만 했다는 것이었다. 생리컵은 탐폰보다 훨씬 컸으므로 이를 넣는 과정에서는 [컵을] 두 번 이상 접어야 했다. 어떤 비협조적인 컵은 원형으로 열려서 질벽을 봉인하는 형태가 되도록, 한 손가락 혹은 두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이동시켜야 했다. 빠르게 피를 흡수하고 자주 교체해주어야 하는 탐폰과는 반대로 생리컵은 한번 자리를 잡으면 반나절이나 그 이상 동안 피를 모을 수 있었다. 컵을 꺼내는 일은 좀 더 솜씨를 요구했다. 밀봉 상태가 해제되도록 쥐어짠 다음, 조심스럽게 컵을 질 바깥으로 당기면서 비틀어야 했다. 너무 쥐어짜면 피가 넘칠 수 있었고, 너무 기울이면 쏟아져 손과 타일 바닥이 피로 얼룩지기 마련이었다. 여성들은 태서웨이를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 알았지만, 어떤 여성들은 그들의 컵을 헹궈서 재사용했다. 태서웨이를 사용하는 일은 마분지로 된 어플리케이터[탐폰 흡수체를 질 안으로 밀어넣기 위한 피스톤 모양의 겉통]와 내부 끈이 달려있어, 사용자가 질에 직접 손을 대는 일이 최소화되었던 탐폰과는 완전히 달랐다. 사실 이 새로운 상품은 여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몸에 매우 실천적(hands-on)으로 손을 대게 함으로써 월경을 마주하게 했다. 

 

태서웨이는 여성 건강 운동가에 의한 상품도, 여성 위생 산업계의 페미니즘에 대한 반응도 아니었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발명도 아니었다. 태서웨이의 바로 전 모델인 태셋(Tassette)은 [이미] 10여 년 전에 출시되었다. 생리컵은 기업적 발명으로, 미국의 주류 대중에게 광고되고 판매되었다. 그러나 컵의 소박한 기원이 이 급진적인 특성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태서웨이를 사용하기 위해 여성들은 마치 자가 검진용 검경을 사용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내부 생식기를 직접 만져야만 했다. 비록 일부 여성들이 이미 피임용 다이어프램(diaphragm)을 삽입하는 일에 익숙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흡수되지 않은 월경혈과 조우하기 마련이었다. 태서웨이는 급진적인 대안이면서 흔한 상품처럼 팔렸다는 점에서 이율배반적이었다. 

 

월경혈을 모으는 삽입식 컵에 대한 발상은 적어도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는 탐폰의 상품화보다 앞선 것이다. 그러나 현대적 생리컵 이야기는 1937년에 시작된다. 최초로 상업화된 탐폰 탐팩스가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 코네티컷 스템포드의 리오나 왓슨 차머스(Leona Watson Chalmers)는 여성 위생에 대한 두 권의 책을 썼고, 그녀가 고안한 태스-엣(Tass-ette) 컵을 깨끗한 여성의 몸이라는 요구에 대한 위생적 이상형으로 여겼다. 

1937년, 태스-엣 광고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여성의 가장 큰 시련을 완화시키는 데는 여성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새로운 탐폰 광고와 마찬가지로 이 삽입형 태스-엣은 오래된 “위생 보호를 위한 부피 큰 도구”보다 나았는데, “벨트도, 핀도, 패드도 필요 없기 때문”이었다. 탐폰과 달리 이 고무 컵은 다시 쓸 수 있었고 “매달” 계속 쓸 수도 있었다. 1950년대 후반까지, 태스-엣을 발전시키기 위해 이십년 간 노력하는 동안 차머스는 아주 제한적인 성공을 거둔 상태였다. 생리대를 포기한 여성들은 그들의 삽입형 상품으로 생리컵이 아닌 탐폰을 골랐다.

 

그러나 1958년, 차머스는 월스트리스 저널에서 그녀 눈에는 태스-엣의 운명을 바꿀 것처럼 보이는 한 광고를 보았다. 갓 은퇴한 사업가가 낸 그 광고는 그의 세 아들이 발전시킬만한 새로운 상품 아이디어를 구하고 있었다. 차머스가 전화로 생리컵 아이디어를 타진했을 때 사업적 감각이 있던 그 가족은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해했다. 형제 중 로버트 오렉(Robert Oreck)은 이렇게 회고했다. “여성의 생리라는 은밀한 문제에 연루되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들과 아버지가 그 아이디어를 곰곰 생각하는 동안, 로버트의 아내 셜리(Shirley)는 태스-엣을 직접 시험해보았다. 그 가족들 사이에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녀는 즉시 태스-엣을 괜찮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차머스로부터 생리컵의 권리를 획득해야 한다는 그녀의 평가에 힘을 실어주었다. 로버트 오렉이 태셋(Tassette)의 사장이 되어 지휘권을 잡았다. 이것은 그의 형제들, 아내들이 이사진이 되고, 아버지가 종잣돈을 댄 가족 사업이었다. 그러나 곧 회사는 재정난에 빠졌다. 수익은 단순히 비용을 만회하기에 너무 적었다. 1963년, 태셋은 모든 광고와 제조를 중단했다. 로버트 오렉과 동료들은 그 상품의 재사용성이 이 상품에 수년의 수명을 부여하며, 이 상품이 재판매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수수께끼에 대한 대답은 곧 생리컵의 일회용 버전, 즉 태서웨이(Tassaway)가 되었다. 사업을 시작한 지 수년 후에, 이 회사는 베벌리 힐즈로 자리를 옮겨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부활한 태셋사(Tassette.Inc)는 1969년 후반부터 캘리포니아에서 일회용 태서웨이컵을 팔기 시작했다. 일 년 간의 고무적인 시범적 마케팅 결과을 얻은 후, 태셋 관리부는 유통을 확장할 준비가 되었다는 데 동의했다. 그들이 고용한 광고인 J 월터 톰슨(J. Walther Thompson)은 태서웨이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로버트 오렉은 회고했다. “그들은 그 상품을 완전히 사랑했어요. 그들은 그것이 시장을 휩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탐폰과 생리대를 대체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들은 거기에 미쳐 있었죠.” 이런 긍정적인 예측을 듣고 나서 태셋 임원들은 미국 동부 시장을 위해 플로리다에 제조 부지를 조성하기 시작했고, 1971년에는 3백만 달러 규모의, 주요 여성지의 전면 광고를 포함한 전국적인 광고 캠페인을 시작했다. 태서웨이 광고는 <코스모폴리탄>, <미즈 에보니(Ms., Ebony)>와 <맥콜스(McCall's)>를 비롯한 잡지에 게재되었다. 또 회사는 Walgreen’s, Caldor, Savon과 Giant를 포함하는 주요 약국과 식품 유통업체와도 유통계약을 체결했다. 그해 봄, 태서웨이는 전국적으로 팔렸고, 가을에 그 회사는 국제적 마케팅을 시작했다. 오렉은 이 새로운 상품의 잠재성에 열광한 유럽 제조사들과 유통 계약을 체결했다. 이 새로운 일회용 컵이 언론매체들 사이에서 인지도를 얻게 되자 회사는 이름을 태서웨이사(Tassaway, Inc)로 바꾸었다. 

 

태서웨이 광고는 여성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컵이 들어 있는 박스나 컵 자체에 등장하는 유일한 그림은 컵이 잘 다듬어진 엄지손가락과 검지로 잡혀있거나 때때로 접혀있는 모습이었다. 당시 한 페미니스트 평론가는 태서웨이 광고가 “사실적이며 지적인 사람들에게 어필했다”고 썼다. 그 저자는 만족스러운 듯  “여성 월경 상품들이 가야할 광고들이 가야할 방향”이라고 지적하면서, 그 광고의 문장과 어휘들이 다른 상품들이 보여주는 것보다 복잡하며, “여성의 마음에 대한 존중“을 보여준다고 썼다. 구매자가 될 여성들을 설득하기 위한 언어들은 솔직했고 일차적으로 편리함에 관한 것이었다. 광고 문구들은 “탐폰이 아닌, 패드가 아닌”, “생리대보다 낫고, 탐폰보다 나은“ 같은 무뚝뚝한 것에서부터, “생리 주기 한 번에 오직 여섯 번만 교체하세요”, “하루에 한 번이나 두 번만 교체해도 되는 새로운 생리용품”같은 실용주의적인 것들이었다. 태서웨이 광고는 그들의 기능이나 뛰어남을 설명하기 위해 그 상품의 낯섦을 장점으로 삼았다. “이것은 매우 새롭고, 당신에게는 전적으로 좀 낯선 아이디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수 년 간 사용해 온 것보다 훨씬 잘 작동한다면, 그리고 예상치 못한 돈을 돌려준다면, 써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어떤 광고들은 여성들이 구매한 첫 팩에 대해 우편으로 돈을 돌려주었다. 태서웨이는 때때로 텔레비전 광고를 시도하기도 했는데, 그 최초의 여성용 위생용품 일부는 1971년 낮 시간 여성 프로그램과 심야 영화들을 통해 광고가 되었다. 

 

1971년 5월호 코스모폴리탄을 본 여성들은 114쪽의 기억력 퀴즈 고득점 요령 바로 위에 있는 태서웨이 광고를 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공공연하게 선언하고 있었다. “어떤 것도 흡수하지 않는 최초의 생리용품 광고를 소개합니다.” 이 광고는 전형적인, 직설적인 태서웨이식 언어로 구성되어 있었고, 접힌 컵과 안 접힌 컵, 그리고 그들의 패키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광고는 흑백이었지만, 지역 슈퍼마켓의 선반에 있는 태서웨이 상자는 아주 유쾌한 밝은 노랑이었다. 여성들은 소매가격으로 1달러가 조금 넘는 돈으로 8개 들이 태서웨이 한 상자를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근처에 있는 40개 들이 탐팩스 상자는 거의 2달러에 팔렸다. 탐팩스라는 선택지는 달러 당 더 여러개의 상품을 제공하고 있었지만, 태서웨이 상자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약속했다.

 

박스 안의 설명서는 태서웨이 사용법이 탐폰 사용법과는 다르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아주 길었다. 특히 “집어넣고 뺄 때 새로운 테크닉이 요구”되었다. 이 테크닉은 그 회사가 강력하게 사용자들에게 “설명서를 조심스럽게 읽어보고, 생리 전에 태서웨이에 익숙해지”라고 격려할 정도로 새로운 것이었다. 이 설명서는 삽입과 제거 양쪽의 위험성에 대해서 동등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특별한 방법으로 컵을 접으라고 설명하면서, 그 설명서는 직접적으로 여성들에게 그 삽입식 상품의 질 안쪽의 위치잡기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설명은 이런 것이었다. “탐폰 사용자들은 질 입구에 있는 근육을 지나쳐 탐폰 전체를 넣는데 익숙합니다. 이것은 태서웨이에는 틀린 방법입니다.” 컵이 한번 들어가서 정확하게 자리를 잡은 다음 몇 시간 후의 제거는 마찬가지로 간단하지 않았다. 비록 태서웨이의 끝에 여성들을 가이드해 줄 꼭지(tab)가 달려 있었지만, 그것은 탐폰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잡아당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리컵을 제거하는 동안 미끄러운 컵을 쥐고 있기 위한 손잡이였다. 설명서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약한 진공 상태인 새지 않는 태서웨이 봉인 상태를 해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태서웨이를 바로 잡아당기지 마세요.” 설명서가 주장하듯이, 그리고 여성들이 발견했듯, 이런 경험은 탐폰 사용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태서웨이의 성공적인 사용은 명백하게 설명서를 주의 깊게 읽고, 탐폰 사용자들에게는 제2의 본성처럼 되었을 행동들을 기꺼이 교정할 것을 요구했다. 어떤 여성은 성공했고 어떤 여성들은 아니었다. 한 여성은 그것이 “매우 편하고 사용자 친화적”임을 발견한 반면, 다른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재앙이다! 난 이걸 제대로 넣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떤 여성은 회사로 태서웨이 사용의 어려움에 대한 분노의 항의편지를 보냈다. 이런 편지의 필자들은 컵을 제거할 때의 어려움을 묘사했지만, 이런 회고에서 분명한 것은 그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꼭지를 당겨 컵을 빼려고 했을 때 경험한 고통을 언급했다. 여러 사례에서 꼭지가 망가졌고 여성들은 패닉에 빠져 의료 기구를 써서 컵을 빼 줄 의사를 방문했다. 회사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원인을 조사해본 바로는 이 여성들이 제거시의 설명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설명서에 그 꼭지(stem)가 탐폰의 끈과는 다른 것이라고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여성들은 마치 생리컵이 외부적인 방법에 의해서만 제거될 수 있는 것처럼 태서웨이를 대했다. 아마도 그들이 탐폰에 익숙해서, 또 컵에 대한 기대가 탐폰에 대한 것과 비슷해서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컵을 제거하기 위해서 질에 접촉하는 내밀한 행동에 불편을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다. 

 

1970년대 아이콘이 된 건강 교과서 <우리의 몸, 우리 자신(Our Bodies, Ourselves)>의 월경 항목을 보면, 저자들은 일부 여성들이 생리대와 탐폰에 불만족스러워한다는 것을 알았고, 두 종류의 임시적 대안을 제시했다. 한 가지는 “월경 추출”로 다우너와 로스만의 Del-Em를 쓰는 것이었다. 이는 저자들에 의해서 “실험적”인 것으로 묘사되었으며, “상응하는 도구가 없고, 여성 자신의 해부학적 구조에 익숙하지 않고 살균 상태”가 아닐 때에는 추천되지 않았다. 즉 그것은 페미니스트 건강 활동가라는 작은 그룹 밖의 누구에게도 추천되지 않았다. 다른 선택지는 다음과 같았다. “플라스틱 컵(Tassaway), 약국에서 팔고, 질의 괄약근 안에 위치시키고 혈액을 모음. 탐폰이나 생리대의 4배가량 모을 수 있다.” 태서웨이는 대다수의 독자들에게 유일하고 가시적인, 탐폰과 생리대의 대안이었다. 그러나 이런 대안에 관심을 가졌을 이들에게는 불행하게도 그 책이 여성들의 책장에 닿았을 무렵, 태서웨이는 퇴출의 길을 걷고 있었다. <우리의 몸, 우리 자신>의 지면을 보고 생리컵의 아이디어에 흥미를 느꼈을 여성들은 아마도 약국(pharmacy)에서나 감소 중인 태서웨이의 유통분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태서웨이사는 단순히 수익을 창출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 컵이 그와 회사 양측에 빠르게, 엄청난 돈을 벌어줄 것으로 기대하고 돈을 빌려준 톰슨(J. Walter Thompson)에게 수백만 달러를 빚졌다. 태서웨이 사장 로버트 오렉은 그렇게 신속하게 행동한 것과 광고인의 유토피아적 비전을 지나치게 믿은 것을 후회했다. 그는 자신을 “그 분야의 초심자”로 기억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저는 끌려가고 있었어요.” 2010년, 오렉은 애석해하며 말했다. 여전히 “왜 모든 여성들이 그 상품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저는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태서웨이의 충성스런 사용자들은 좋아하는 상품을 잃게 되어 행복하지 않았다. 1981년, 회사의 공식적 추정에 의하면 컵이 소멸해가던 몇 년 동안 이만명 이상의 여성이 회사에 편지를 썼다. 어떤 이들은 자포자기했고 어떤 이들은 분노한 채 요구했다. 한 여성은 이렇게 간청했다. “도와주세요! 제 것이 다 떨어져가고 있고, 어떤 상점의 선반에서도 찾을 수가 없어요. 어디에도요! 만약 시장에서 회수한 게 있다면” 그녀는 애원했다. “제발 저에게 남은 것 중 이년 치를 보내주세요. 태서웨이를 다시 팔기 전까지요.” 그녀는 분명 동요하고 있었다. “저는 넘치고, 얼룩지고, 가려운 데 지쳤어요. 제발 빨리 응답해주세요.” 1977년 6월 말, 다른 여성은 이렇게 사정했다. “저한테 좀 팔던가, 상품을 파는 곳을 좀 알려주세요. 저는 그것 없이는 살 수가 없고 비슷한 것도 없다고요. 도와줘요!!!” 그러나 이 여성들은 어떤 대답도 듣지 못했다. 거대 체인과 지역 약국에 있던 대량의 태서웨이 재고들은 마지막 컵을 쌓아두려는 충성스런 소비자들에 의해 줄어들었다. 마지막 태서웨이 십만 박스는 모두 개별 여성들에게 팔렸다. 태서웨이가 시장에 있던 마지막 몇 년 동안에 회사는 오백만 상자, 즉 사천만개의 일회용 컵을 팔았다. 그러나 1973년 초 그들은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가동을 중단했다. 두 번의 실패로 태서웨이는 그들의 생리컵과 함께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원조의 재사용가능한 컵 디자인은 살아남았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탐폰 산업은 재앙을 경험했다. 수많은 탐폰 사용자가 독성 쇼크 증후군(Toxic Shock Syndrome)을 앓았고 이는 수 십 명의 사망과 프록터 앤 갬블[P&G]의 고흡수성 탐폰 릴라이 브랜드의 회수조치로 이어졌다. 1980년 후반, 환경에 대한 인식이 점차 높아지자 이 스캔들에 편승하여 기업가이자 전 태셋 유저 로 크로포드(Lou Crawford)는 레오나 차머스 생리컵의 라텍스 고무 버전을 출시했다. 키퍼(keeper)로 알려진 이 컵은 오늘날까지도 생산되고 있으며, 자연적이며 건강한 탐폰의 대안으로 칭송받았다. 이것은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다른 수많은 재사용가능한 생리컵들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2000년대 e 커머스가 부상하면서 생리컵은 르네상스를 맞았다. 갑작스럽게 부상한 수십 개의 컵 제조사들은 더 널리, 전 세계 대중들에 닿을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소셜 네트워킹 기술, 그리고 기꺼이 그들의 경험을 공유하려는 애호가들 덕분에 인터넷에서 일종의 컬트가 된 이 상품의 지위를 이용한다. 언뜻 보면 그 컵은 좀 이상해 보일지 몰라도, 1970년대 검경을 휘두르던 페미니스트 건강 활동가들 같은 열정을 가진 수천의 인터넷 컵 전도사들은 지금 당신과 다른 이들을 확신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