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는 보리초코보

[번역] 강간 키트의 비밀스런 역사 (1/3) 본문

번역

[번역] 강간 키트의 비밀스런 역사 (1/3)

보리초코보 2020. 9. 19. 21:40

www.nytimes.com/interactive/2020/06/17/opinion/rape-kit-history.html?referringSource=articleShare

 

Opinion | There Are Many Man-Made Objects. The Rape Kit Is Not One of Them.

This is the story of the woman who forced the police to start treating sexual assault like a crime.

www.nytimes.com

(*영어 공부 삼아 + 기술사 연구자로서도 흥미로운 글이어서 번역해 본 글. 가볍게 잡았는데 길고 무겁고 또 흥미로운 글.

기사에 대한 제 상세한 감상은 이어지는 가장 끝 포스트에 달아둠.)

 

마티 고다드(Marty Goddard)가 첫 발상을 떠올린 것은 1972년이었다. 그녀가 시카고 할스테드(Halsted) 거리에 있는 한 허름한 연립주택에서 십대들을 위한 상담 전화에 자원봉사를 하러 갔을 때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자원봉사자 대부분은 들쭉날쭉하게 머리를 기르고, 구슬 목걸이를 걸고 있는 히피들이었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아주 단정한 스커트와 자켓, 팬티스타킹, 굽 낮은 힐 차림이었고, 올빼미 같은 안경을 쓰고, 짧은 금발머리를 하고 있었으며, 자주색 립 정도를 제외하면 화장을 거의 하지 않았다. 31살, 신랄한 유머 감각에, 결혼 경험이 있는 그녀의 이름은 마사(Martha)였지만 모두가 그녀를 마티라고 불렀다. 그녀는 이것을 좋아했는데, 남자 같은 이름 뒤에 숨는 것이 유용했기 때문이었다. 자원봉사를 하면서, 고다드는 곤경에 빠진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나중에는 그들을 “집 나온 10대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임신했거나, 집이 없거나, 자살 욕구에 시달리거나, 마약에 찌들어 있었다.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그들 대부분이 모험을 쫓아 집을 나온 반항아가 아니라 성폭력의 희생자라는 사실이었다. 가족들 사이에서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는 십대들이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나중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았을 때, 난 완전 이성을 잃었어." 그녀는 1970년대 초 무렵에는 누구도 묻지 않았던 것을 묻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가해자들이 빠져나가는가? 어떻게 그들을 멈추게 할 수 있는가?

 

고다드는 성폭행을 여성적 망상이 아닌, 조사 가능한 범죄로 인식시키기 위한 캠페인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증거를 모을 면봉과 빗, 그리고 이것들을 봉할 봉투 등으로 구성된 최초의 표준화된 강간 키트(rape kit)를 고안함으로써 그녀는 과학 수사의 혁명을 시작했다. 이것이 범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발명된 전례없이 강력한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아마 마티 고다드의 이름을 결코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고다드와 그녀의 발명품은 같은, 그러니까 둘 다 엄청나게 중요하며 계속해서 간과되는 운명을 걸었다.

몇 년 전, 전국 각지의 창고에 검사되지 않은 수십 만개의 강간 키트가 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나는 격분했고, 많은 이들이 했을 질문을 떠올렸다. 이 무시된 증거들 덕분에 대체 얼마나 많은 강간범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을까? 가령 1995년 여성을 성폭행한 나단 포드(Nathan Ford) 사건에서 경찰에 제출된 강간 키트는 그가 21명을 더 강간하고 2006년에 유죄를 선고받을 때까지 17년 간 방치된 상태였다. 나의 또 다른 질문은 강간 키트 같은 잠재적으로 강력한 도구가 어떻게 처음 나타났냐는 것이었다. 나는 거의 이십년 간 발명가들과 새로운 기술이 어떻게 사회적 변화를 가져왔는지, 또 어떻게 전에 없던 것을 가능하게 했는지를 보도해 왔다. 내게는 강간 키트 시스템이야 말로 유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 정도로 여성을 학대한 남성들을 잡기 위해 디자인된 기술이 있었나? 

이 키트의 유래에 대해 생각하자마자, 나는 수수께끼에 부딪혔다. 대부분의 자료들은 그 키트가 1970년대, 시카고 경찰의 경사 루이스 비툴로(Louis Vitullo)에 의해 발명되었다고 , 하지만 또 몇몇 자료들은 비툴로와 활동가 마사 고다드가 함께 만든 것으로 쓰고 있었다. 무엇이 진실인가? 강간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나는 누구를 믿어야 할지를 스스로 찾아보기로 했다. 비툴로는 2006년에 사망했지만, 내 생각에 고다드는 분명 생존해있었다. 어떤 부고도, 그녀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도 없었다. 그녀는 2003년에 인터뷰를 한 적도 있었다. 나는 아리조나의 모든 마사 고다드 명의의 전화로 전화를 걸었지만, 어떤 것도 연결되지 않았다. 이 수수께끼를 푸는데 무려 6개월이나 걸릴 것이라는 사실을 이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비록 그녀의 역할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가 사법 시스템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강간 키트의 발명가와는 거리가 먼 루이스 비툴로가 고다드의 천재성을 가로챘고, 그 키트에 자신을 이름을 붙일 것을 주장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나는 고다드의 가족을 찾기 위해 수 개의 결혼과 부고기사들을 이어붙이고, 일어난 일을 재구성하려고 수 백 건의 신문 기사를 읽었다. 심지어 1970년대 이래 시카고 경찰 아카이브를 살피기 위해 연구자도 고용했다. 마침내, 나는 여덟 명의 그녀의 친구 혹은 함께 일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런 자료들, 그리고 그녀 자신이 자신의 삶을 풀어놓은 두 개의 구술사 테이프를 통해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이어 맞춰낼 수 있었다. 

 

시카고 재난 센터로 돌아가자. 마티 고다드는 십대들이 속마음을 털어놓도록 격려했고, 곧 얼마나 많은 십대들이 성적으로 학대받고 있는지를 알아채기 시작했다. 당시 대다수 사람들은 아동 성폭력은 드물다고 생각했는데, 가령 1970년대 한 정신의학 교과서는 근친상간이 오로지 백만 가구당 한 건 정도 일어나며, 이는 아버지를 성적으로 유혹한 여자아이의 잘못으로 일어나곤 한다고 주장했다. 아직 미국 모든 주에서 남편이 아내를 강간하는 것이 합법인 시대였다. 가정 내 성폭력은 강간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진짜 강간이란 잘못된 때, 잘못된 장소에 있을 정도로 멍청한 여성들에게나 일어나는 "거리 강간(street rape)"을 의미했다. 시카고에서 강간은 일종의 자연 재해, 그러니까 코트 없이 겨울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죽이곤 하는 대서양의 바람 같은 것이었다. 활동가 나오미 웨스테인(Naomi Weisstein)은 이렇게 썼다. "시카고는 해가 진 이후에는 돌아다닐만한 도시가 아니었다“. 강간은 “전염병"이었다. 1973년, 만 육 천 명의 여성이 시카고 및 인근 지역에서 성폭행을 당했으며, 이 중 십분의 일만이 경찰에 신고되었고, 그 중의 십분의 일만이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극히 적은 수의 범인이 감옥에 갔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수백만의 사람이 경찰이 실패하고 있다고 느끼던 시절이었다. 시카고는 여전히 일리노이 흑표당 의장 프래드 햄턴(Fred Hamton)이 자기 집 침대에서 경찰에 의해 살해당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흑인 구역을 점령하고 있던 시카고 경찰은 잔인하기로 악명 높았다. 시민 단체들은 경찰들의 행동을 개혁할 자문 위원회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의 한가운데서, 고다드는 오늘날엔 당연하지만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질문을 시작했다. 성폭력을 수사한다면? 만약 성폭력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녀의" 이야기 대신 과학적인 증거로 배심원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고다드의 방식을 맘에 들어하지 않았던 상당수 남성과 달리, 시카고 백화점 상속자 레이 웨이볼드 주니어(Ray Wieboldt Jr)는 1972년, 그녀를 진보 운동을 후원하는 가족 자선 재단인 웨이볼드 재단 이사로 고용했다. 웨이볼드의 이름은 그녀의 비밀무기가 되었다. "'저는 웨이볼드 재단의 마티 고다드에요'라고 하면, 사람들은 저를 들여보내줬죠." 그녀는 곧 이런 방식으로 병원 관리자들과 피해자 그룹과 접촉할 수 있었고, 강간에 대해 치열한 문제제기를 시작했다. 

 

범죄연구소는 아직 DNA 검사를 할 능력이 없었다. 1986년이 되어서야 영국에서 강간 피해자를 살해한 범인을 잡기 위해 DNA가 법의학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들은 유리조각과 지문, 비산 흔적, 총기와 섬유를 분석할 수 있었다. 가령 수사관들은 혈액형을 비교해서 범인들을 찾아내는 것 같은, 생물학적인 단서를 이용할 수 있었다. 고다드는 이런 모든 증거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 누구도 성폭력이 일어났음을 증명할 수 없는지를 알아내고자 했다. 그녀는 피해자들이 보통 폭행 후에 병원에 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경찰들은 벌벌 떨고, 슬퍼하고 있는 피해자들을 응급실에 던져놓고는 이렇게 외쳤다. "여기 강간 한 건이요." 간호사들은 희생자들을 씻기거나 피묻은 드레스를 벗겨내는 과정에서 의도치않게 증거를 파괴하고 있었다. 경찰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대신에 경찰은 피해자를 작은 방에 격리하고는 피해자가 거짓말을 하는지 알아내려고 떠 보곤 했다. 1973년의 시카고 경찰 훈련 매뉴얼은 "많은 강간 호소인들은 논리적이지 못하“며, "불행히도 여성 대부분은 부정한 애인이나 바람기 있는 애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강간당했다고 주장할 것"이라고 쓰고 있었다. 대다수 경찰은 여성들에게 뭘 입고 있었는지, 어떤 유혹적인 방법으로 폭행을 유도했는지, 섹스를 즐겼는지를 물었다. 메뉴얼에 따르면 "진짜 강간 피해자는 대체로 명예를 잃은 사람 같은 인상”을 주기 마련이었다.

법의학 초기인 19세기, 강간 검사는 일차적으로 여성의 덕성을 조사했다. 의사는 여성의 처녀막을 검사하고, 여성의 동기를 보고하도록 소환되곤 했다. 방종한 여자나 매춘부인가? 아니면 순수한 심장을 가진 정직하며 진실을 말하는 여성인가? 1868년, 영국의 레이놀드의 한 신문에  그러한 예시가 실렸다. 의사는 "검사는 그녀가 스스로를 대변할 수 있을 정도로 정결하지는 않다는 의심의 여지없는 증거를 주었"다고, 하급판사는 "그런 증거로 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배심원은 누구도 없을 것이기에 그 죄수를 석방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즉, 성폭행 법의학은 남성이 희생자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그녀가 희생자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하는 시스템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범인을 밝히는 것과는 거의 무관했다. 심지어 1970년대에도 법의학은 여전히 일종의 과학적 정의를 위한 가부키 극장이자, 형식적인 것이었다. 이곳에서 경찰은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했다. 그들은 이야기를 하고, 책임을 돌렸으며, 이런 권력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고다드가 생각하기에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이러한 시스템을 고칠 유일한 방법은 명약관화한 과학적 증거, 그러니까 강도나 살인미수에 사용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과학적 증거였다. 피해자의 이야기가 배심원들을 확신시킬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범죄연구소에서 나온 증거가 이를 뒷받침해야 했으며, 이 증거를 얻기 위해 고다드는 병원 관계자, 형사, 실험실 테크니션들과 피해자 간 협력을 증진시킬 도구를 필요로 했다. 그녀가 깨달은 것은 증거를 파괴하도록 디자인된 시스템으로부터 이를 지킬 매커니즘을 찾아내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는 사실이었다. 

 

마티 고다드를 찾아다닌 지 몇 달이 지나도 그녀도, 가족들의 이름조차도 알아낼 수 없었지만, 나는 고다드의 성전에 함께 했던 신시아 게리(Synthia Gehrie)를 찾아낼 수 있었다. 1973년 반강간 운동가 모임에서의 첫 만남 이후 그들은 곧 점심과 저녁 시간에 그들의 접시를 노트삼아서 전략을 짜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당시 미국시민자유연맹(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에서 주간 근무를 하고 있던 게리는 두 사람이 권력을 가진 남성이 하여금 만연하는 강간을 인식하게 할 방안을 고안해냈을 때 크게 감명 받아 고다드의 조수를 자처하게 되었다. 1974년이라는 타이밍은 절묘했다. 모든 것이 시카고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때 부끄러워했던 여성들이 이제 말하고 있었다. 10월, 일리노이 의원 총회 전 한 교외 여성위원회의 회합에서 한 여성은 그녀가 어떻게 부지깽이를 가지고 성폭행을 막으려고 했는지를, 습격 후에 조심스레 구부러진 부지깽이를 들고 가서 형사에게 건내었을 때의 일을, 그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 형사가 구부러진 부지깽이를 펴 돌려준 일을 묘사했다. 그 멍청이는 그녀가 그것을 고쳐주길 원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 어머니는 어린 딸이 유치원에 가는 길에 추행을 당했으며, 경찰이 최소한 한 명 이상의 어린이에게 성병을 옮긴 그 아동 성애자를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는 자유롭게 활개치고 있었던 것이다. 한 간호사는 의료진들이 강간 사건들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증언하는 도중에 "나 자신이 강간 피해자"임을 고백하기도 했다. 

며칠 후 여성을 위한 시카고 여성 법률 행동 그룹(CLAW: Chicago Legal Action for Women)의 70여 명의 여성들이 지방검사 버나드 캐리(Bernard Carey)의 사무실 앞에 모여 다음과 같은 메시지로 벽면을 채웠다. "수배함: 강간범을 지원하고 부추기는 버나드 캐리." 강간 문제는 갑자기 캐리의 문제가 되었다.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 캐리의 긴급한 과제가 되었다. 마치 #Me too 운동같은 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활동가들 상당수가 부유한 백인 여성들이었기에 정치가들은 여기에 주목했다. 성폭력과 관련해 시카고의 가장 가난한 지역의 흑인 여성들이 가장 위험한 상태였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거의 신문에 나오지도 않았다. 강간은 자주 교외의 질병처럼 묘사되곤 했다. 고다드는 경력 내내, 이런 불평등을 마주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1982년, 그녀는 일리노이 주 입법 위원회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 흑인 피해자들의 대다수가 거주하는 시카고 남부와 서부 지역의 행정력 부족은 완전히 꼴사나운 수준입니다."

 

다시 1970년대 초로 돌아가자. 그녀는 오로지 한 가지에 집중했다. 그녀는 만약 의지만 있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문제의 답이 있다는 사실을 버나드 캐리에게 확신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느 날 예고 없이 그녀가 캐리의 사무실에 들이닥쳤을 때, 놀랍게도 그는 그녀를 환영했다. 그는 "뭐가 답인지 모른“다고는 했지만, 고다드 같은 여성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 강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캐리는 고다드와 게리를 강간 문제 시민 자문 위원으로 임명했으며, 그들의 목표는 경찰 행정에서의 실패를 조사하고, 전면적인 개혁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마티 고다드는 마침내 그녀가 원하던 경찰 내부로 들어갈 허가를 얻어냈다. 새로 획득한 조사 권한을 이용해서 그녀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경찰에게 묻기 위해 시카고 범죄 연구소로 향했다. 몇 년 후의 구술사 자료에서 고다드는 자신이 그곳에서 알게 된 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경찰들은 의료진들을 비난했다. "우린 모발이 없어요. 손톱 부스러기도 없고요.” 슬라이드들은 라벨이 붙어있지 않았고 "고무 밴드로 묶"여 있곤 해서 다른 것들을 오염시켰다."그런 식이라고요. 의미가 없어요." 그녀는 그 누구도 간호사와 의사들에게 증거들을 적절하게 모으는 방법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병원에 의료진, 형사, 그리고 실험실 테크니션들이 쉽게 협력할 수 있게 하는, 쓰기 편한 법의학 도구를 구비한다면? 이 구상이 점차 한 물건, 즉 면봉과 작은 병, 그리고 설명서가 포함된 키트로 귀결되었다. 그 와중에 고다드는 경악스러운 근친상간 사건을 담당하고 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형사 루디 니목스(Rudy Nimocks)와 친해졌다. 고다드와 게리는 그를 멘토로 표현했다. (그는 현재 90대 가량으로, 나는 몇 번이나 그를 만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여러 자료로 볼 때, 니목스는 고다드에게 조심스럽게 진행하라고, 범죄 실험실의 남자들에게 직접 도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리고 니목스는 고다드가 현미경 부서장인 루이스 비툴로를 한 편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했다. 비툴로 경사는 헝클어진 셔츠 위에 실험실 가운을 대충 걸친 꾀죄죄한 경찰-과학자였고, 살인 도구들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내는 창백하고 불안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였다.

어느 날 자리에 있는 비툴로를 발견한 고다드는 자기를 소개하고는 작성한 설명서를 가지고 강간-키트 시스템을 설명했다. 그녀는 분명 그 후에 일어난 일에 당혹스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게리는 이후의 일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그녀에게 소리를 질렀"고 "여기에는 그녀와 관계있는 일이 없고, 그녀가 말하는 것들을 다 미쳤다고, 그녀가 그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그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게리는 고다드가 비툴로의 사무실에서 쫒겨나서 몇 분 후에 마음을 달래려고 건 전화를 받았다. "음, 그렇게 잘 되진 않았어!" 고다드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고다드가 보기에 거기서 강간-키트 발상은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였다. (계속)

 

borichocobo.tistory.com/38

 

[번역] 강간 키트의 비밀스런 역사 (2/3)

www.nytimes.com/interactive/2020/06/17/opinion/rape-kit-history.html?referringSource=articleShare Opinion | There Are Many Man-Made Objects. The Rape Kit Is Not One of Them. This is the story of the..

borichocobo.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