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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강간 키트의 비밀스런 역사 (2/3)

보리초코보 2020. 9. 19. 21:43

www.nytimes.com/interactive/2020/06/17/opinion/rape-kit-history.html?referringSource=articleShare

 

Opinion | There Are Many Man-Made Objects. The Rape Kit Is Not One of Them.

This is the story of the woman who forced the police to start treating sexual assault like a crime.

www.nytimes.com

발명, 구조, 디자인 - 이것들은 단순히 기술적 업적이 아니다. 그것들은 정치적 행동이다. 발명가는 우리에게, 놀랍거나 혹은 끔찍할 수도 있는 새로운 마법적인 능력을 부여한다. 질병을 중단시키거나, 대양저의 지도를 그리거나, 인간 노동자를 기계로 대체하거나, 혹은 더욱 효과적으로 적을 죽이는 능력 같은 것들. 그리고 이런 마법적인 능력들은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낸다. 하버드 대학 교수인 실라 자사노프가 말한 것처럼, 기술은 "법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지배한다." 내 생각에 성폭행과 관련해서 데이트 강간 약물에서부터 스토커웨어 같은 소프트웨어에 이르기까지, 남성들을 도망치게 해주는 많은 발명품이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여성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만 고안된 기술과 디자인이 너무도 적다는 것이다.

공공 공간이 얼마나 남성의 권력을 강화하는지를 생각해 보라. 여자아이로 자랐다면 도시를 걸을 때 잠재적인 성폭력이 일어나는 장소들에 대해서 배웠을 것이다. 숨겨진 출입구, 빈 지하철 플랫폼, 벽이 높은 통행교 같은, 위협으로 넘치는 장소들. 내가 고등학교 시절 운전 수업을 받을 때, 강사는 우리에게 비어있는 주차공간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들에 대해서 강의했다. "숙녀분들, 누군가가 덤불에서 튀어나올 때 지갑을 더듬거리고 싶진 않죠?" 그러면서 그는 차로 서둘러 갈 땐 손에 차키를 쥐고 있는 게 좋다고 했다. 겨우 십대였지만 난 그게 엄청나게 이상하게 들린다고 생각했던 걸 기억한다. 만약 어디에나 강간범이 숨어있다면, 어른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거리가 내게 속한 게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계단실이나 한밤의 텅 빈 세탁실이나. 나는 여전히 1980년대 목가적인 코네티컷 캠퍼스에서 대학생으로서의 첫 주에 느낀 패배감을 기억한다. 내 마음은 감질나게 하는 숲과 숨겨진 연못들을 탐험할 생각으로 근질거렸다. 그러나 새내기 여학생들이 들어간 강의실에서 치안 부서장은 우리에게 만약 밤에 다른 건물로 걸어가고 싶다면, 여성들을 호위해주고 강간으로부터 지켜주는 에스코트 서비스를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말도 안 돼!"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순간 나는 마치 작은 어린애처럼 추행 당하는 것을 상상해보려고 했다. 나는 그 교내 호위 서비스를 결코 이용하지 않았지만, 캠퍼스가 내 것이라고 여긴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건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공공 공간과 도구들을 모두를 위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하다. 우리의 환경과 기술은, 평등과 다원주의의 감각을 길러낼 수 있다. 마티 고다드가 법의학 기술을 재발명하려고 노력하던 바로 그 순간, 장애인 단체는 훨체어로 접근 가능한 건물과 거리를 만들도록 요구함으로써 도시의 디자인을 완전히 바꾸고 있는 중이었다. 휠체어 사면은 단순히 누군가를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중요하며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메시지를 발산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발명의 힘이다.

 

아마 왜 강간 키트가 비탈로 경사와 다른 경찰들에게 공격적으로 느껴졌을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위대한 기술적 아이디어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당시의 가정, 즉 간호사들은 법의학 증거를 모으기에는 너무 멍청하며, "강간을 호소"하는 여성들은 보통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강간은 증명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강간에서의 증거란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는 당시의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경찰이 하는 일을 누구나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도구들로 가득찬 종이 상자에 대한 제안이 나타난 것이다. 처음에 그렇게 반응하긴 했지만 비툴로는 고다드의 제안을 숙고했고, 이 제안이 흥미롭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분명하다. 그는 그녀가 보여준 계획을 살펴보고는 그것이 일리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리에 따르면, 어느 날 비툴로 경사가 고다드를 호출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게 보여줄 것이 있소.“ 고다드가 그의 사무실에 도착하자 "그는 그녀에게 모든 아이템이 봉인되어 있는 온전한 키트의 샘플을 건냈다." 비툴로는 강간 검사를 위한 시제품을 조립했고 그 자신의 몇몇 꾸밈들을 더했으며, 이 때 그는 자신을 이 키트의 발명가로 여겼다. 

고다드의 또 다른 친구가 이 이야기를 확인해주었다. 1980년, 고다드를 만났던 마리 슬레덱 드레이저(Mary Sladek Dreiser)에 따르면, 고다드는 공적으로는 언제나 비툴로를 칭찬했지만, 사적으로는 "그저 그 키트에 그의 이름이 붙기만 한다면 잘 지낼 수 있는" 좀스러운 폭군으로 묘사했다. 강간-키트의 아이디어는 남성들이 움직이는 지방 검사 사무실과 경찰 간의 협력의 산물로서 회자되었다. 고리에 따르면 개혁을 주도했지만 기여를 거의 인정받지 못한 고다드는 이에 동의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강간 키트를 가능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중반, 고다드는 여전히 위볼드 재단에서 일하면서 밤과 주말에는 피해자 지원을 위한 시민위원회라는 비영리 기구를 설립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그 그룹은 1978년, 고다드의 발명이 한 남자의 이름으로 알려지게 한, 그 비툴로의 증거 수집 키트를 트레이드마크로 등록했다. 몇 년 후 신문은 강간 키트를 "비툴로 키트"라고 불렀으며, 2006년 그가 사망하자 한 부고기사는 그를 "강간 키트를 발명한 남자"로 기렸다. 부고 기사에서 그의 아내 베티는 강간 키트로 "로열티를 전혀 받지 않은" 그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부고기사는 비툴로를 사법 시스템을 변화시킨, 새로운 증거물 수집의 형태의 선구자로 추앙했다. 고다드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었다. 

그녀의 이름이 빠져있었음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침내 도시 전역에 강간 키트를 사용하기 위한 허가를 얻었다. 그녀에게 없었던 것은 키트를 만들고, 보급하고, 이를 사용할 간호사들을 훈련할 돈이었다. 그녀는 성범죄 생존자들을 대표하는 그녀의 비영리 기구를 이용해서 돈을 모아야만 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주정부 기구는 범죄 실험실을 통한 살인 증거들에 비용을 대지만, 성폭행에는 그러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돈 문제는 항상 강간 키트 시스템을 따라다녔다. 키트를 검사하는 것은 1000에서 1500달러 정도로 비쌌다. 가장 주목받는 사건들을 제외하고는 경찰은 언제나 비용부족을 호소했으며 키트는 쌓여갔다. 이것이 바로 피해자 자신이 범죄 실험실에 돈을 대야만 했던 이유였다. 지난 몇 십년간, Joyful Heart Foundation 같은 단체들이 수백만 달러의 강간 키트 검사 비용을 댔다. 그 돈은 때때로 빵을 팔아서, Etsy crafts나 페미니스트 스탠드업 쇼에서 나왔다. 기금 마련은 어려웠다. 대부분의 재단들이 "강간"이나 "섹스"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으면 후원을 꺼렸기 때문에 기금 마련은 1970년대 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 되었다. 고다드 역시 어디든 돈이 있는 곳에 기대야만 했다. 이 장면에서 바로 휴 헤프너가 등장한다.

시카고는 덜 노골적인 포르노 위에 지어진 도시였으며, 헤프너가 바로 그 도시의 가장 유력자였다.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그의 클럽 하우스 마티니 런치에 슬그머니 다가갔고, 유명인들은 반짝이는 기금함을 채우기 위해 그의 맨션 주변을 배회했고, 빛나는 "플레이보이" 사인은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달아오르게 했다. 헤프너는 여성 해방 운동이 남성을 수치와 죄책감으로 해방시키겠다는 그 자신의 노력의 자매 운동이라고 여겼다. 그의 플레이보이 자선 재단이 페미니스트 대의에 돈을 쏟아 부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1970년대 초, 플레이보이의 자금은 당시로서는 약간 유명했던 변호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공동으로 설립한 미국시민자유연맹의 여성권리 프로젝트를 위한 종자돈이 되었다. 1970년대 중반, 고다드는 강간 키트 시스템에 착수하기 위해 플레이보이의 만 달러(오늘날로는 오십만 달러)짜리 지원금을 신청했고, 지원금을 받아냈다. 

고다드와 플레이보이 재단 간의 협력은 곧 놀랍도록 이상적인 것이 되었다. 고다드가 내부에 친구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가릿 포코니 (Margaret Pokorny, 나중 이름은 Margaret Standish)는 프로젝트 전반을 검토하는 것을 넘어 온갖 종류의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가령 그녀는 플레이보이지 그래픽 디자이너를 고용해서 그 키트의 디자인을 맡겼다. 키트를 조립할 자원 봉사자들이 필요해지자, 그녀는 아주 창의적인, 여성 노인들을 부른다는 발상을 떠올렸다. "제가 아주 좋은 생각이 있는데요, 마티.(...) 모든 사람이 플레이보이 토끼를 좋아하고, 나이든 여성들은 뭔가 할 것을 원하거든요." 그래서 어느 날, 노년 여성들이 플레이보이 사무실에 나타나 공짜 커피를 마셔대면서, 강간 키트를 조립했던 것이다.

 

1978년, 마티 고다드는 한 신문이 "이런 종류로는 전국 최초“라고 묘사한, 그녀 자신이 고안한 파일럿 프로그램을 실시하기 위해 시카고 지역 25개 병원에 최초의 표준 강간 키트를 배포했다. 이 키트의 가격은 개당 2.5달러로 검사용 튜브, 슬라이드, 표본이 섞이지 않도록 막아주는 포장재들, 모발과 섬유를 채취하기 위한 빗, 소독된 손톱깎이, 피해자의 옷을 담을 백, 그리고 희생자를 위한 상담과 후속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장소를 알려주는 카드로 구성되었다. 이를 비툴로와 고다드의 협력에 기반한 계획이라고 묘사한 뉴욕타임즈는 이 "무해해보이는" 상자가 "강간범들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게 할 강력한 신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했다. 타임지에 따르면 이 시스템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이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할 것 없는 기술이라는 사실이었다. "의사, 경찰과 관련된 서류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봉인 테이프나 슬라이드에 쓰기 위한 연필도 포함되어 있다. 이 상자를 다루는 누구나, 키트 박스 표면에 서명하도록 하게 되어 있다".그것은 피해자의 몸에서 채취된 증거물이 범죄실험실에 이르는 경로를 보여주는 기록이 될 예정이었다. 

1979년 말, 거의 3000개의 키트가 범죄 실험실로 들어왔고, 그 중 일부는 28살의 윌리엄 존슨에 의해서 납치 강간을 당한 한 버스 운전사가 제출한 것이었다. 그가 60년 형을 선고받은 이 법정에서 비툴로 증거 키트가 승리의 공적을 얻었다. 이 무렵 고다드의 친구 루디 니목스는 성 살인(sex homicide) 부서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시카고 트리뷴에 그 새로운 시스템이 증거 수집을 개선시키고 있다고 말했는데, 사실 더 중요한 것은 그 키트가 법정에서 마법처럼 작용했다는 사실이었다. "키트는 정말 실용적이고(...) 우리는 키트가 증거 수집에 대해 일정한 기준을 가진 배심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공식적인 파란색과 흰색으로 포장되고, 도장과 봉인이 찍힌 그 키트는 과학적 도구로서뿐 만 아니라, 연극적인 소품으로서 기능했다. 판사와 배심원에게 남편이 어떻게 그녀를 죽이려고 했는지 흐느끼면서 회상하는 증인석의 여성의 말은 마치 욕심 많은 우발적인 범죄자처럼 들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 범죄 실험실의 테크니션이 나타나 구겨진 드레스와 정액 얼룩, 피를 보여주었다. 실험 가운을 입은 과학자가 그 이야기를 확인해줄 때, 그것이 진실로 보였던 것이다. 고다드는 단지 키트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강간 기소에 대한 새로운 생각의 방식을 발명했다. 이제는 피해자가 증언을 하면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의사, 간호사, 법의학 전문가들이 그녀가 본 사건을 뒷받침했고, 키트 그 자체가 재판의 한 등장인물 즉 또 다른 증인이 되었다.

 

고다드가 비툴로 명의로 된 그녀의 아이디어를 기꺼이 트레이드마크를 삼은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녀의 발명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 역시도 사라져야만 했다. 만약 어떤 과학적 경력도 없는 한 여성이 그것의 유일한 발명자로 알려진다면, 그 강간 키트는 결코 견인차가 될 수 없었다. 그것은 남성으로부터 와야만 했다. "기술"이라는 단어가 문제의 일부이다. 기술은 "남성이 만드는 물건"의 동의어이다. 역사가 오텀 스탠리(Autumn Stanley)가 지적했듯이, 여성의 기여를 포함하는 수정 역사는 아마도 모든 종류의, 그러니까 요람이나, 생리대, 그리고 음식 보존 기술 같은 "중요하지 않은" 기술들을 포함할 것이다. 간혹 여성들이 이런 세계를 탐험하는 유일한 방법은 실험실 가운을 걸친 백인 남성들에게 그들의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대변하게 하고는, 그들 자신은 그 이면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가령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여섯 명의 여성(girls)들은 세계 최초의 다목적 전자 디지털 컴퓨터, 즉 에니악을 조작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1946년, 이 여성 중 한명인 베티 홀버튼(Betty Holberton)은 그 컴퓨터를 신문사들의 카메라 앞에 처음으로 선보이기 위해 밤을 지새웠지만, 그녀와 다른 여성들은 마치 전화 교환수들이나 그저 남성 엔지니어의 단순한 조력자 취급을 받았다. 홀버튼이 거의 보이지 않게 1950년대와 60년대 컴퓨팅을 위한 핵심적 도구들의 상당수를 디자인하고 발명하는 동안, 그녀의 남성 동료들은 시대의 천재로 추앙받았다.

 

고다드는 분명 사라지는데 있어서 천재적이었다. 그녀의 친구들과 1970년대 동료들은 그녀와 연락이 끓어졌고, 내가 그랬듯이 그녀가 사라진데 대해 당혹스러워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녀를 선명하게, 그리고 단속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가끔 나는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난 열쇠 구멍을 통해 그녀를 훔쳐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녀는 미니어처 룸을 만들었어요." 마가렛 포코니가 고다드가 핀셋과 조그만 붓들을 가지고 상자 속 동화 같은 인테리어들을 만드는 데 수 시간을 썼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 작은 방들은 고다드의 아파트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마치, 분해된 인형의 집처럼. 

신시아 게리를 통해 나는 왜 고다드가 그렇게 아주 작은(Lilliputian) 판타지 속으로 도망치고 싶어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1970년대 말, 고다드가 하와이 리조트에 휴가를 보내러 갔다가 시카고로 돌아왔을 때 다른, 피폐한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고 했다. "난 강간당했어." 고다드가 게리에게 어떤 남자가 어떻게 자신을 납치했는지, 괴로운 설명을 쏟아내면서 말했다." 그는 그녀를 외진 곳으로 데려가서 칼을 들이댔어요. 그녀는 원하는 것은 뭐든 하겠다고 했죠. 결국 그녀를 그를 리조트 뒤로 데려갔고, 그가 그녀를 보내줬을 때는 경악했어요." 게리는 고다드가 이를 경찰에 신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다드가 가진 피해자-권리 운동에서의 저명함이 그녀를 타겟으로 만든 것은 아닌지 항상 생각했다고 말했다. 범인은 그녀의 신뢰를 이용했다. 고다드가 그가 대의의 지지자인 척 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내가 찾은 모호한 인터뷰 중 하나에서 고다드 자신이 강간과 상처가 그녀의 몸에 남긴 것들에 대해 언급했다. 범인은 그녀에게 헤르페스를 옮겼다. 

나는 가슴이 아팠고, 전에 없이 그녀를 찾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미 그녀는 내게 마티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마치 내 친구 같았다. 그녀가 남긴 일련의 주소들을 통해 그녀가 빈곤 속으로 떨어져 내려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점차 이야기를 쫒는 저널리스트라는 느낌을 덜 받고 있었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너무 늦게 전에 마티 고다드를 구하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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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강간 키트의 비밀스런 역사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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